트로트를 따라 부르는 아내, 그 신기한 기적
- 소심하고 조용한 사람이던 그녀
- 치매와 함께 시작된 변화
- 어느 날부터인가, 차 안에서 들리는 트로트
- 다른 사람과 살았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 착한 치매일까, 신이 준 마지막 재능일까
- 오늘도 그녀는 나직이 노래를 부른다
- 요약정리
소심하고 조용한 사람이던 그녀
내 아내는 언제나 조용하고 배려 깊은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밝고 명랑한 성격을 가졌지만,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무척 부담스러워했다. 그녀는 늘 한 걸음 뒤에서 다른 이의 말에 귀 기울이며, 말없이 주변을 살피는 사람이었다. 본인의 이야기를 꺼내기보다는 상대방의 말을 조용히 들어주는 쪽. 그렇게 남을 먼저 생각하고, 스스로는 늘 조심스럽게 행동하던 아내였다.
우리는 긴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연애 시절부터 결혼 후까지, 아내는 술 한 모금 입에 대본 적이 없었다. 노래방에서도, 가족 행사나 친구 모임에서도 단 한 번도 노래를 부르려 하지 않았다. 마이크를 잡는 걸 상상조차 못 할 만큼, 무대에 서는 일은 그녀에게 두려움에 가까웠다. 노래는커녕 박수 한 번 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던 사람. 나는 그런 아내의 성향을 이해했고, 오히려 그런 모습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살아왔다.
치매와 함께 시작된 변화
그런 아내가 몇 해 전부터 알츠하이머를 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깜빡임으로 시작됐다. 장을 보고 돌아와 놓고 온 물건이 하나둘 생기고, 방금 한 말을 또 하고, 했던 일을 금세 잊어버리는 일들이 자주 있었다. 그렇게 점차, 그리고 분명하게 그녀는 변해갔다. 가족의 이름을 헷갈리고, 익숙한 길에서 길을 잃고, 아침에 있었던 일을 저녁이면 까맣게 잊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 현실은 너무도 고통스러웠고, 하루하루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나보다 더 당황하고 힘들었을 아내의 마음을 생각하면 더욱 가슴이 아프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여전히 배려 깊은 사람이다. 스스로가 혼란스러울 때조차, 내 눈치를 보고, 아이들의 기분을 살피며, 주변을 배려하려 애쓴다. 아내의 그런 마음이 고맙고 또 안타깝다.
어느 날부터인가, 차 안에서 들리는 트로트
요즘 우리는 자주 드라이브를 한다. 집 안에만 있으면 아내의 무료함이 깊어지는 듯해, 바람이라도 쐬자며 차에 오른다. 목적지도 없는 채, 서울 외곽 도로를 따라 이천 근처 양지까지 다녀오곤 한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 조용한 차 안, 그리고 가끔 흘러나오는 라디오 음악. 그 평범한 시간 속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트로트 음악이 아내의 귀를 사로잡았다. “저 노래, 나 알아.”라며 따라 부르기 시작한 아내. 나는 놀라움에 순간적으로 핸들을 놓칠 뻔했다. 가사 하나하나를 정확히 기억하며, 박자에 맞춰 멜로디를 이어가는 모습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단순한 흥얼거림이 아니었다. 정확히 음을 잡고, 박자를 맞추며, 때로는 손짓까지 곁들이는 ‘노래 부르기’였다.
다른 사람과 살았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이후로 아내는 기회만 되면 노래를 불렀다. 혼자 있을 때도, 내가 옆에 있을 때도, 심지어 친구나 형제가 동행한 자리에서도 트로트가 들리면 자연스럽게 따라 불렀다. 나뿐만 아니라 함께 있던 모두가 놀라워했다. "언제부터 저렇게 노래를 잘했지?"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가끔은 아내를 무대에 세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지만,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아내가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는 듯했다. 목소리는 맑았고, 표정에는 생기가 돌았다. 치매라는 병이 그녀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갔지만, 그 안에서도 살아남은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모습이, 이렇게 뜻밖의 방식으로 다시 피어난 것이다.
착한 치매일까, 신이 준 마지막 재능일까
치매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고 들었다. 성격이 거칠어지고 폭언이나 폭행으로 가족을 힘들게 하는 ‘나쁜 치매’가 있는가 하면, 조용히 자신을 잃어가는 ‘착한 치매’도 있다고. 나는 아내가 다행히 후자에 속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아내가 보여주는 이 노래 재능은, 어쩌면 신이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준 소중한 선물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가사 한 줄 한 줄을 정확히 기억하며, 박수를 치고 리듬을 타는 그녀를 보면 마음이 뭉클해진다. 아무도 알지 못했던, 아내 스스로도 몰랐던 노래라는 재능. 치매라는 어둠 속에서 뜻밖에 피어난 이 한 송이의 꽃은, 나에게는 기적처럼 느껴진다.
오늘도 그녀는 나직이 노래를 부른다
그녀는 여전히 나의 아내이고, 나의 친구이며, 나의 인생이다. 그녀의 기억이 점점 흐려진다 해도,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한, 그녀는 내 삶의 전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차에 오른다. 트로트 한 곡을 틀어주면, 아내는 밝게 웃으며 노래를 따라 부른다.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따뜻하고, 가슴 찡하다. 가끔은 눈물이 날 것 같지만, 난 꾹 참고 운전대를 잡는다.
“당신은 나의 인생”이라는 가사처럼, 아내는 여전히 나의 전부다.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속삭인다.
“오늘도 당신과 함께 있어서, 정말 고마워.”
요약정리
자주 묻는 질문
- Q. 실제 이야기인가요?
A. 네, 실존 인물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 Q. 치매 환자에게 노래가 도움이 되나요?
A. 음악 치료는 정서 안정과 기억 자극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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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곁에 있는 사람의 노래를 들어보세요. 어쩌면 그 안에 잊지 못할 사랑이 담겨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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